"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시켜라"라는 말은 매우 심오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다. 우리는 보통 남에게 먼저 이야기하여 이해받고 싶어 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은 이해하려는 의도를 갖고 듣는 게 아니라 대답할 의도를 갖고 듣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말을 하고 있거나 말할 준비만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패러다임을 통해 모든 것을 여과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기 경험을 심어 주고자 한다.
"예, 나는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압니다."
"나도 똑같은 일을 경험했어요. 자, 내 얘기를 들어 봐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자기 자신이 겪은 일을 다룬 영화를 계속 투사해 준다.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안경을 쓰라고 처방해 주고 있는 셈이다. 만일 그들이 아들이나 딸, 배우자, 직원들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다면 그들의 태도는 통상 이러하다. "그 사람은 날 이해하지 못해요."
어떤 아버지가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 애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 애는 도대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아요."
"당신이 방금 말한 것을 제가 다시 한번 말해 볼까요? 아들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라고 내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했다.
"다시 한번 확인하죠. 당신은 그 애가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까?" 내가 말했다.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겁니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먼저 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내가 넌지시 말했다.
"그렇네요!" 하고 그가 다시 말했을 때 그의 얼굴에는 어떤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요, 맞습니다. 하지만 난 벌써 그 애를 이해하고 있어요. 난 그 애가 겪고 있는 심정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나도 똑같은 과정을 경험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왜 그 애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가입니다."
사실 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만을 들여다보고는 자기 아들의 생각을 이해했다고 간주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 대부분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나름의 논리로 가득 차 있고 모든 것을 자기 경험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해받기를 원한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각자의 독백을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우리의 태도는 보통 다음의 다섯 가지 수준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첫 번째는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로, 이것은 실제로 전혀 듣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응, 그래, 그렇지, 맞아" 등의 맞장구를 치면서 듣는 체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선택적 청취로, 대화에서 어떤 특정한 부분만 듣는 경우이다. 어린아이들이 끊임없이 재잘댈 때 우리는 곧잘 이러한 방식으로 듣는다. 네 번째는 집중적 경청으로, 상대가 하는 이야기의 주의를 기울이고 그 말에 총력을 집중하여 듣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가장 고차원적인 '공감적 경청'어로 극히 소수만이 이러한 태도로 듣는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적 경청이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흉내 내는 '적극적' 경청이나 '반영적' 경청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한 종류의 경청 기법은 내적 성품이나 인간관계와의 관계가 먼, 단순히 기술에 바탕을 두는 기법이다. 따라서 이 같은 기법은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자서전적, 즉 자기 경험 중심적이다. 우리가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다면 실제 상호작용에서 자기 경험을 투사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청취하는 동기는 항상 자기중심적이다. 비록 반영적 경청기법으로 듣고 있지만 청취하는 의도는 대답하고 통제하고 조종할 목적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적 경청이란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경청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즉 진정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다.
공감적 경청이란 다른 사람이 가진 준거 틀의 내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 즉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따라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들의 패러다임과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공감이란 동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감은 합의의 한 형태이며 판단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이것은 때때로 분위기에 맞춰 표현된 감정과 반응이다. 사람들은 곧잘 동감에 의지하게 되는데 이는 사람들을 서로 종속적으로 만든다. 공감적 경청의 본질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감정적으로는 물론 지적으로도 완전하고 깊게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공감적 경청은 말하는 내용을 마음속에 새기고 반응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전문가의 추정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 중 불과 10%만이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의해 전달되고 있다고 한다. 다른 30%는 우리가 내는 소리에 의해, 나머지 60%는 우리의 신체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공감적 경청을 하는 경우 우리는 귀로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욱 중요한 눈과 가슴으로 듣는다. 이때 우리는 감정과 의미, 행동까지도 경청한다. 이것은 오른쪽 뇌는 물론 왼쪽 뇌까지도 사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지 하고 직관하고 느끼는 것이다.
공감적 경청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공감적 경청은 자기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투사하고 생각, 느낌, 동기, 해석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머리와 가슴 내부에 어떤 실체가 들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경청한다. 상대방의 깊은 영적 커뮤니케이션까지도 수신하는 데 초점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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